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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대종회
2007/9/27(목)
민족운동가-구연영 의사, 순국 100주년  

민족운동가 구연영 의사 순국 100주년기념 추모행사

 

순국 장소에서 추모예배 및 기념비 제막식

「 1907년 8월 24일 일본군들은 악독한 고문을 하면서 구연영 부자의 팔과 다리를 일본도로 찌르고 그래도 조금도 굴하는 기색 없이 의연하게 견디자 이를 본 일본군은 마침내 총을 난사하여 부자(父子) 분이 함께 쓰러져 순국하고 말았으니 때는 순종 정미년(1907년) 8월 24일(음력 7월 16일) 이었으며 선생의 향년은 44세요 아들 정서는 25세였다. 부자(父子)가 총살당하는 순간 줄곧 청명하던 날씨가 갑자기 흐려지더니 천둥 번개에다가 소낙비가 쏟아졌고, 그러자 사람들은 악독한 왜놈들이 의인을 죽여서 하나님도 노하신 것이라고 말들 했다고 한다. 具然英 부자를 살해한 일본국 수비대는 다음날 이포나루를 건너다가 분개한 의병들의 기습을 받아 섬멸되었다고 전해진다.(이천의 의병활동과 3ㆍ1운동, 53면. 이천향토사연구회편)」

 

  지난 8월 28일.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이천의 의병장이며 기독교전도사이자 애국계몽운동가로서 항일투쟁을 하다가 기독교 감리교단의 목회자로서 최초로 순국한 구연영(具然英) ㆍ구정서(具禎書) 父子의 순교 100주년을 맞이해서 이 분들이 남기신 애국 애족의 숭고한 정신을 널리 선양하기 위해 순교 장소인 경기도 이천시 창전동에 있는 어린이공원에서 이천시와 기독교대한감리회 중앙연회의 주관으로 이천ㆍ광주시민과 교계인사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구연영 의사 순국 100주년 추모행사와 기념비제막식이 있었다.

   이날 추모행사는 1ㆍ2부 순서로 나누어 진행되었는데 1부 추모예배에서는 강성완 목사(궁평교회)의 기도에 이어  권혁구 목사(삼성교회)가 신앙과 애국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그리고 기독교대한감리교단 중앙연회의 감독인 박영준 목사(이천중앙교회)가 축도를 했으며 조병돈 이천시장과 김태일 이천시의회 의장의 추모사가 있었다. 유족으로는 고인의 손자인 철회(喆會)ㆍ진회(振會)ㆍ충회(忠會)ㆍ장회(丈會)ㆍ광회(光會)의 가족들이 참석하였다. 1부 추모예배에 이어 2부 행사에서는 이천시 YMCA청년회원들이 100년 전 당시의 순교 장면을 재연한 퍼포먼스가 있었고 이어서 비문낭독이 있은 후에 순국기념비의 제막식이 있었다. 기념비는 이천시와 이천시의회ㆍ기독교대한감리회중앙연회ㆍ이천문화원ㆍ이천YMCAㆍ이천중앙교회ㆍ신갈교회ㆍ도지교회ㆍ현방교회ㆍ노곡교회ㆍ궁평교회ㆍ이포교회ㆍ양평장로교회 등이 참여하여 공동으로 제작하였다. 구연영 의사는 도원수파 도정공의 후손이며 2남인 성서(聖書) 종인이 대종회장(제6대)을 역임했다.

 

 

 

 

 

 

민족운동가 구연영 순국기념비

구연영은 1864년 8월 20일 구철조 씨의 3남으로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춘경, 본관은 능성이며 18세 때 변미례와 결혼하여 슬하에 정서ㆍ성서ㆍ완서ㆍ종서 네 아들을 두었다. 구연영은 누구의 전도도 받지 않고 1897년 2월 자진하여 상동교회 스크랜턴 선교사를 찾아가 기독교인이 되었고 3년 후 덕들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구연영은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가 이끄는 엡윗청년운동에 적극참여하여 민족 운동가들과 교류하면서 민중계몽, 강연, 선교, 구국활동과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구연영은 이천중앙감리교회 제3대 담임전도사로 부임하여 경기도 광주ㆍ이천ㆍ여주ㆍ양평지방을 돌며 전도하였고 노곡ㆍ궁평ㆍ이포ㆍ양평 등지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으로 일본의 조선침략이 노골화되자 구연영은 김하락ㆍ김태원ㆍ조성학ㆍ신용희와 함께 이천으로 내려와 1,000여 명의 의병으로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를 조직하여 전국 최초로 의병항쟁의 기치를 내걸었다. 이천수창의소의 중군장이 된 구연영은 1896년 1월 넓고개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첫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두었으며 그 후 이현 전투와 남한산성 전투를 비롯한 의병투쟁을 앞장서서 지휘하였다.

  구연영은 1905년 정식 전도사 칭호를 받고 이천읍 교회를 비롯한 아홉 교회 교인을 이끌게 되었는데 그는 칼 대신 성경을 들고 십자가의 구원을 외치며 이천ㆍ광주ㆍ장호원ㆍ여주 지방을 순회하였고 자신의 집 앞에다 장대 끝에 십자가를 메달아 세워놓고 예배를 드리면서 의병활동과 선교활동, 애국계몽활동을 병행하였으며 밤에는 구국회원들과 기도회를 열고 항일계획을 논의하였다. 구연영의 설교주제는 늘 항일과 일진회의 정체 폭로였으며 일본의 죄상 폭로였다. 이러한 규탄 강연으로 일본 측으로부터 주목을 받아오던 중 일진회의 밀고로 아들 정서와 함께 체포되었다.

  구연영 부자는 이천 관아(전 이천경찰서 자리)로 끌려가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신앙과 애국의 신념은 변하지 않았고 일본경찰로부터 애국동지 명단공개를 강요당했으나 끝내 함구하고 굴하지 않았다. 일본경찰들은 비분하는 부자의 팔다리를 칼로 찌르고 갖은 고문을 자행했으며 결국 이천 장터 홰나무 아래 묶인 채 부자가 함께 당시의 관아 서편 작은 언덕(창전동 365번지)에서 총살당하였다. 이날이 1907년 8월 24일(음력 7월 16일)로 그때 구연영의 나이 44세였으며 아들 정서의 나이는 25세였다.

  1963년 3월 1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고 아들 정서에게는 1991년 건국공로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구연영은 누구보다 나라를 사랑한 감리교의 자랑스러운 순교자이며 이천의 의기를 드높인 순국지사였다. 구연영, 그 이름은 순국의 높은 뜻과 함께 이 땅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그 고귀한 순국의 정신을 기리는 뜻에서 피 흘렸던 자리에 기념비를 세운다.

 

                                       2007년 8월 24일

                        구연영의사 순국 100주년 추모행사추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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