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대종회
2007/2/20(화)
충렬공 탄생 600주년 기념 학술강연회 기조연설문  

                    박 광 운(경기도 광주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
(편집자 주 : 아래의 기사는 지난해 11월 4일 경기도 광주문화원에서 개최된 충렬공 탄생 600주년 기념 추모학술강연회에서 제1강연인 「충렬공의 생애와 행정가로서의 업적」에 대한 강연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충렬공(忠烈公) 구치관(具致寬)은 1406년(태종6)에 태어나 1470년(성종1)년에 65세를 일기로 타계한 조선 초기의 문신(文臣)입니다. 본관은 능성(綾城)이고 자는 이율(而栗)ㆍ경율(景栗)이며, 현조(玄祖)인 예(藝)는 고려조에서 면천(沔川) 고을을 사향(賜鄕)받아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이 되었습니다. 고조(高祖)인 영검(榮儉)은 고려조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선충익찬공신(宣忠翊贊功臣)으로 중대광 전리판서(重大匡典理判書)를 역임하였고  증조(曾祖)인 위(褘)는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에 증직(贈職)되어 문정(文貞)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고, 조부(祖父)인 성로(成老)는 여러 벼슬을 두루 거쳐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事), 개성부윤(開城府尹), 강원도도원수(江原道都元帥)를 역임하여 명성이 자자하였습니다. 부친 양(揚)은 정주(定州)ㆍ광주(廣州)ㆍ공주(公州)등 세 고을의 목사(牧使)를 지내면서 청백(淸白)하고 애민(愛民)하여 이름을 남겼으며, 공의 모친은 해평 윤씨(海平尹氏)로 4남을 두었는데 공은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공의 부친 목사공(牧使公)은 재능에 못 미치는 벼슬을 하였으나 그 가문을 일으킬 사람은 마땅히 그 장남이라고 하였답니다. 1429년(세종11)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434년(세종16)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子)로 관직에 출사(出仕)하였습니다.
공은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등 여러 내직에 있다가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로 나갔으며 1451년(문종즉위년) 병조정랑(兵曹正郞)이 되어 평안도(平安道) 도체찰사(都體察使) 김종서(金宗瑞)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발탁되었습니다. 이때가 그의 나이 45세였으니 그의 출세 길은 늦은 편이었습니다. 그것은 서거정(徐居正)의 신도비문(神道碑文)에서도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즉 공(公)은 성품이 곧고 바르며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적극적으로 일을 하되 깨끗함으로 추천(推薦)하고 이끌어 주는 사람이 없어 하급관료에서만 10년 이상을 옮겨 다녔습니다. 사람들이 공의 지위가 낮음을 말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는 높은 곳을 향하여 당당하게 갈 뿐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여러 선생들이 말하기를 󰡐구공은 그릇이 큰 사람인데 어찌 남의 밑에 오래 있으리오󰡑 라고 하였답니다. 1451년(문종즉위년) 12월 김종서(金宗瑞)의 천거(薦擧)로 수호군(守護軍)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문종실록(文宗實錄)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치관(具致寬)은 학문(學問)과 이재(吏才 : 관리로서 일을 처리하거나 백성을 잘 다스리는 재주)가 있어서 김종서의 천거로 임명되었다.
1452년에는 의주읍성(義州邑城)의 수보(修補)를 책임 맡아 군사 4000명을 동원하여 완공하였으며 1454년에는 계유정란(癸酉靖亂)이 발발하여 세조(世祖)의 명을 받고 함길도(咸吉道)에 가서 경성부사(鏡城府使) 이경유가 반란을 일으켜 그를 처치하라는 어명을 받고 나아가 참살하고 보공대호군(保功大護軍)이 되었으며 뒤이어 동부승지(同副承旨), 좌승지(左承旨)가 되었습니다. 1455년에는 세조(世祖)가 즉위하면서 좌익공신 3등에 책록되었고 능성부원군(綾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이조참판(吏曹叅判)이 되었습니다.
공은 문관(文官)이면서 군무(軍務)에도 밝아 세조(世祖)는 북쪽 변방(邊方)의 야인들의 준동(蠢動)을 방비하는데 있어서 공을 내세웠던 기록이 세조실록(世祖實錄)에서 여러 번 발견됩니다. 즉 세조 4년 2월에 평안도 도절제사에 임명되어 서북방 야인들의 침노를 막게 하였으니 세조가 공의 병법이나 진법(陳法)등을 크게 인정한 것입니다. 세조실록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평안도(平安道)는 북방의 중요한 관문(關門)으로 적의 침입에 대하여 소홀히 할 수 없는 곳인데 주로 무신(武臣)들만을 절도사(節度使)나 절제사(節制使)로 등용하여 변방을 다스림은 잘못된 것이다. 문무(文武)를 겸비한 중신을 보내 변경을 안정시킴이 옳을 것이다. 내가 경을 곁에서 떠나보내고 싶지 않으나 변방을 지키는 장수의 임무 또한 매우 중요하여 경을 번거롭게 하였소 이번에 경이 가면 내가 다시는 서쪽 변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요 라고 世祖는 公에게 당부한 것입니다.
구치관은 이처럼 문무(文武)를 겸비한 중신(重臣)으로 등용되어 평안도를 진정시키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돌아왔습니다.
1459년(세조5) 7월에는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어 조정(朝廷)의 인사권(人事權)을 쥐게 되었는데 공은 일체 사사로운 청탁을 배척하고 훌륭한 인재 발굴에 힘쓰고 적재적소에 인물을 배치함으로써 관료사회의 기강을 확립하였습니다.
이조판서로서 직무에 충실하였음을 세조실록 7년 1월 17일 기록에서 보면 이조판서(吏曹判書) 구치관(具致寬)의 품계(品階)에 숭록대부(崇祿大夫)를 더하고 강순(康純)을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 都節制使)로 하였다. 구치관은 성품이 엄하고 굳세며 청렴(淸廉) 간소(簡素)하여 그 문정(門庭)에 사사로이 찾아와 청탁하는 일이 없었으며 수년 간 국정(國政)을 잡았으나 사람들의 간언(間言)이 없었다. 라고 하였습니다.
1461년(세조7) 1월에 함길도의 야인(野人)들이 계속하여 국경을 침노하여 약탈하고 백성을 괴롭힘으로 먼저 신숙주(申叔舟)를 함길도 도체찰사(咸吉道 都體察使)로 삼아 평정(平定)케 하였으나 제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세조는 구치관(具致寬)을 함길도 도체찰사로 임명하여 출진케 하였는데 함길도에 출진한 구치관은 국경지방의 고을을 침입하여 노략질하고 백성을 괴롭히는 도적들을 군사력으로 퇴치하기도하고 한편으로는 회유(懷柔)하여 귀순토록 하는 등 온갖 노력을 다하여 어느 정도 조용하게 만들었습니다. 함길도에서 돌아온 구치관을 보고 세조는 경은 나의 만리장성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세조는 공의 공로를 인정하여 세조7년 6월에 의정부(議政府) 우찬성(右贊成)을 제수(除授)하였고 1462년(세조8년) 5월에는 품계(品階)가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랐으며 1463(세조9) 8월에는 우의정(右議政)으로 승진하였습니다.
세조는 구치관을 지극히 배려하여 세조10년 12월에는 구치관이 광주(廣州)에 있는 공의 부모 분묘(墳墓)에 가서 치제(致祭)하는데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로 하여금 왕을 대신하여 치제하라고 명하였다는 기록이 실록에 있습니다.
1466년(세조12) 4월에는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영의정(領議政)으로 발탁(拔擢)되었습니다(정승으로 4년)
세조 12년 10월에 한명회가 영의정이 되고 구치관은 능성군(綾城君)에 봉해졌는데 이날 세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구치관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치관은 의논이 정직하고 용모가 엄의(嚴毅)하여 사람마다 존경하고 두려워하였으며 또 능히 청렴하고 근신하여 뇌물을 받지 않았다.
1469년(예종1년) 1월 평안도에 여진족 오랑캐들이 또다시 준동하니 구치관을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으로 삼아 출진케 하였는데 그 때 조카인 호군(護軍) 구겸(具謙)을 데리고 갔으며 여진족(女眞族)의 침입을 토평(討平)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때 공의 나이 63세였으며 신숙주, 한명회 등과 더불어 원상으로서 호조판서(戶曹判書)를 겸직하면서 왕을 보좌하고 서정(庶政)을 의결하였다고 합니다.
1469년 성종(成宗)이 즉위하자 다시 원상(院相)으로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겸직하였으나 1472년(성종2년)에 만 65세를 일기로 서거하였습니다. 사후에 장례비용이 없어 조정에서 일체를 하사하여 장례를 치렀는데 공의 부친의 묘하(墓下)인 실촌면 열미리에 장례하였습니다. 당시 조정에서 공의 장례비용으로 하사된 물품은 조미(糙米) 20석, 중미(中米) 10석, 황두(黃豆) 20석, 백포(白布) 10필, 백면포(白綿布) 10필, 정포(正布) 50필, 종이 1백권, 숯(炭) 20석, 소목(燒木) 2천근이었습니다.

충렬공 구치관은 정치가요 행정가로서 뿐만 아니라 법률가로서 신제대전(新制大典), 경국대전(經國大典)등을 편찬하는데도 신숙주, 최항 등과 더불어 참여한 것을 보면 문무를 겸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장가(文章家)로서도 탁월한 재능을 가졌던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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