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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아직도 의열단이 필요하다  

한겨레21 1075호 에서 펌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0125.html

한겨레21

보도 그 뒤

“우리에겐 아직도 ‘의열단’이 필요하다”

독립운동 동지 구영필·김대지의 손녀들 만나… 김대지 손녀 “구영필의 ‘일제 밀정’ 누명 충격적”

제1075호
2015.08.17
독립운동가의 손녀들이 만났다. 그들의 할아버지는 김대지와 구영필. 그이들은 1891년생 동갑내기, 경남 밀양 출신이다. ‘의열단의 고향’이 밀양인 이유는 김대지와 구영필이 의열단 창설에 깊숙이 관여했기 때문이며, 밀양 후배 약산 김원봉(의열단장)을 ‘배후’에서 지원했기 때문이다. 약산은 이들보다 7살 아래 후배다.

그러나 이네들의 손녀들은 지금 다르다. 김주영(61)씨의 할아버지 김대지는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2012년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김대지를 선정한 국가보훈처의 소개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1920년대 중반 영고탑에서 처음 가정을 꾸렸을 때는 동지들의 도움과 밀양 처가의 지원으로 겨우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20년대 후반 이후에는 더 이상 재정 확보가 막혀 병든 자식을 병원에 데리고 갈 수 없을 정도로 빈궁하였다.”

8월12일 저녁 서울의 한 호텔에서 독립운동가 손녀들이 만났다. 김대지의 손녀 김주영(왼쪽에서 둘째)씨와 제1074호 표지 기사로 조명한 구영필의 손녀인 구미혜·구미능·구미현씨. 박승화 기자

보훈처가 숨긴 사실

중국 베이징에 머물던 김대지를 만주 영고탑으로 오게 한 이가 구영필이며, 구영필이 영고탑에서 일군 정착촌에서 김대지는 지냈다. 그러나 1926년 9월 김좌진이 이끌던 신민부 보안대원들에게 구영필이 암살되면서 정착촌은 풍비박산이 났고 김대지 또한 극심한 빈궁으로 내몰렸다. 보훈처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숨기고 있다.

독립운동을 하던 내내 동지였던 김대지와 달리 구영필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검은 먹으로 지워진 인물이다(제1074호 표지이야기 ‘대한민국이 배신한 밀양 三代’ 참조). 구영필의 후손은 올해 4번째로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했다. 이번에도 보훈처는 거부했다.

8월10일 보훈처의 공문에는 거부 사유로 단 한 줄이 쓰여 있다. ‘밀정 혐의로 인한 피살 사실’. 구영필의 큰손녀 구미혜(75)씨를 비롯한 후손은 가슴을 치고 눈물을 쏟았다. “광복 70년이라는데…. 처음으로 대성통곡하고 울었다. 거부 사유 글귀를 보니까 화가 확 솟구쳤다. 관련 기록을 심사하고 결정한 사람들과 맞짱 토론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배일의 거두, 의열단의 배후’가 ‘친일 밀정’으로 수십 년째 누명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김주영씨가 지난해 펴낸 <줄리아의 가족 순례기>는 구영필의 왜곡된 진실을 밝히는 데 중요한 자료다. 김대지의 아들 김명이 1985년 작성한 회고록과 증언을 바탕으로 김씨가 쓴 책이다. 이 책에서 김씨는 구영필의 존재와 역할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신규수 원광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이 책에서 새롭게 확인된 역사적 사실을 몇 가지로 요약·정리했다.

“윤치형 신문 글이 아주 나쁜 영향”

김주영씨가 2014년 펴낸 <줄리아의 가족 순례기>. 독립운동가였던 할아버지·아버지의 삶을 사실에 근거해 복원했다.
첫째, 구영필과 함께 의열단원들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음을 확인해준다는 것. 둘째, 김대지와 구영필이 일합사와 대한광복단에서 핵심적인 투쟁을 하다가 1918년 일제에 체포된 사실. 셋째, 김대지가 1926년 구영필의 요청으로 영고탑에 도착해, 구영필이 친일 밀정이라며 배척당하다 피살된 배경을 조사한 사실. 신 교수는 “모든 일제 기밀문서는 그(구영필)를 독립운동가로 보고하고 있으며, 일본 영안공사와 제휴한 당시에 국한하여 보더라도 ‘일본을 배격하면서도 친일을 가장한 배일(排日)의 거두’로 감시하고 있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주영씨는 현재 미국에 살고 있다. 8월 들어 보훈처는 김씨를 비롯해 국외에 거주하는 독립운동가 후손 24명을 초청했다. 8월12일 기자와 만난 김씨는 보훈처의 구영필 서훈 거부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김씨는 구영필이 친일 밀정이라는 곡해 때문에 아직도 서훈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난해 처음 알았다.

“그런 일이 있는 줄 몰랐어요.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윤치형이 쓴 1962년 신문 글이 아주 나쁜 영향을 줬어요. 이분 글이 허위라는 게 밝혀져야 해요. 의열단의 본거지가 베이징이었어요. 만약 구영필이 밀정이었다면 의열단이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의열단이 가장 경계했던 게 바로 일제의 밀정이었거든요. 구영필의 억울한 암살은 (만주 영고탑 일대 한인 독립운동 세력 사이의) 파벌 싸움 때문이었다는 게 확실해요. 제 아버지(김명)도 그렇게 기억하셨어요.” 김씨는 중국의 속담을 인용하면서 거듭 안타까워했다. “중국 사람들 말에, 담이 흔들흔들하면 사람들이 다 밀어버린다는 게 있어요. 한 사람의 독립운동 역사를 억울하게 만드는 거예요.”

윤치형의 기고글 반박

“‘아마’라는 단어 써가며 억측”

구영필과 김대지는 의형제였다. 각각 일우(一友)와 일봉(一峰)으로 호를 쓴 것이 의기투합의 한 단면이다. 구영필이 ‘일제의 밀정’이라는 오명을 쓰게 된 첫 계기는 윤치형(1893~1970)이 1962년 6월26~27일 부산 <국제신문>에 두 차례 실은 글이다. 의열단 단원이던 윤치형은 1920년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에 관련돼 일제에 체포된 뒤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아 투옥됐으며, 해방 뒤 경남 의령군수와 민주당 참의원 등을 지냈다. 그는 <국제신문>에 쓴 글에서 구영필을 일제의 밀정으로 지목했다. 윤치형의 글은 이후 국가보훈처에서 구영필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거부하는 핵심 근거 가운데 하나로 쓰여왔다. 그러나 사료와 증언에 근거해 톺아보면 윤치형의 주장이 허위라고 김대지의 손녀 김주영은 반박했다.

1. 구영필이 일제 고등경찰과 내통?

윤치형의 주장“그(구영필)가 언제부터 일본의 밀정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전기(前記)한 일합사 사건으로 김태석에게 취조를 받을 때부터 김태석과 통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김주영의 반박 “일제 고등경찰 김태석은 1915년 일심사(一心社) 사건을 취조했지만 일합사(一合社) 사건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김대지와 구영필이 체포된 시기는 1918년 5월이었고, 체포된 사유는 일합사 사건이 아니라 광복단 사건이었다. 이때는 김태석이 이미 경무부 총감부 고등경찰과로 전직한 뒤의 일이다. ‘아마’라는 단어를 써가며 구영필이 김태석에게 매수된 것처럼 억측한 것이다.”

2. 밀양 폭탄 거사 계획의 밀고자가 구영필?

윤치형의 주장 “뒤에 형무소로 옮겨갈 때 우리들보다 6개월 후에 체포되어 들어왔던 윤세주와 우연히 한 마차에 타게 되어 비밀신호로써 알게 된 사실인데 우리를 배반하고 동지를 일경에 판 자는 그렇게도 믿었던 구영필이었던 것이다.”

김주영의 반박 “밀양 폭탄 사건은 두 차례 검거가 있었다. 분명히 윤치형은 두 번째 검거 때 체포되었다. 모든 역사 기록에 윤세주도 두 번째 검거 때 윤치형과 함께 체포되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들보다 6개월 뒤에 체포되어 들어왔던 윤세주’가 배반자가 구영필이라고 했다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구영필이 아니라 김진규가 밀정이라는 확실한 문건도 있다. ‘피고 김태석은 1920년 7월20일 밀정 김진규를 이용하여 밀양 폭탄 사건의 선동자인 이성우, 윤소룡(윤세주)을 체포하여 취조한 결과 (…).’(친일 고등경찰 김태석에 대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기소장)”

3. 중국에 있어야 할 구영필이 갑자기 밀양에?

윤치형의 주장 ““그런데 거사 준비를 하고 있던 거사일 전에 영고탑에 있어야 할 구영필이가 뜻밖에도 밀양에 있는 필자를 찾아와서 (…).”

김주영의 반박 “구영필이 만주 봉천에서 꾸린 삼광상회는 늦어도 1920년 늦가을까지 의열단의 피신처였고 연락처였다. 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이 구영필을 통해 상해임시정부 등과 연락을 했다. 1920년 10월 김대지는 구영필의 도움과 주선으로 삼광상회에서 변장을 하고 서로군정서를 찾아갈 수 있었다. 삼광상회를 처분하고 영고탑으로 가서 농장 개척을 했으니 1920년 초에 구영필이 영고탑에 가 있을 수 없다. 윤치형의 주장은 틀린 것이다.”

4. ‘일제의 주구’ 구영필을 처단?

윤치형의 주장 “일제의 주구 구영필은 길림성 영고탑에서 그의 배신과 반역에 분노한 우리 애국지사들의 손에 의하여 처단되어버렸던 것이다.”

김주영의 반박 “구영필을 살해한 신민부의 7명은 애국지사들이 아니라 동족을 살해한 살인범들이었다. 신민부가 독립운동 조직이지만 그 조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행위가 모두 정당한 것은 아니다. 사건 전반을 보면 만주 영고탑에서 생긴 신민부와 구영필 간의 충돌은 파벌 간의 알력으로 증오하고 오해하고 거기에 구영필의 농장과 그의 경제력을 견제하고 빼앗으려는 목적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버팀목 역할을 하던 구영필이 암살된 뒤

<줄리아의 가족 순례기>에는 영고탑 일대 한인들의 경제적 버팀목 역할을 했던 구영필이 암살된 뒤 한인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해졌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1931년 일본군이 만주 일대를 침략하기 시작한 9·18 사건 뒤 이 지역 한인들의 빈궁은 극한으로 내몰렸다. 이때 김대지는 부인과 자녀 둘을 잃었다.

“할아버지(김대지)는 독립운동을 하러 밖으로 다니며 집을 돌보지 않았고, 나가면 몇 달이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는 자식들이 아직 어려서 밖에 가서 (돈을) 벌어올 수도 없었고 할아버지는 직업이 독립운동가여서 가정에는 수입이 전혀 없었다. 동지들과 친우들의 얼마 되지 않는 도움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했는데 걸핏하면 사흘씩 굶곤 했었다.

중국말도 모르고 친척도 친구도 없는 낯선 북만에서 할머니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디 가서 쌀 한 홉 동냥하기도 힘들었다. 땔나무도 없고 먹을 식량도 없이 고생을 죽도록 하였다. 아버지는 추운 겨울날 굶주린 배를 끌어안고 추워서 벌벌 떨면서 지냈는데 그때 방 안에서 눈 오줌이 그 자리에서 얼 정도로 추웠다고 한다.

나흘이나 굶자 아이들은 힘없이 축 늘어져버렸다. 할머니는 사색이 되어 허둥지둥 중국 사람의 감자밭으로 달려가 언 감자를 캐왔고 배추밭에서 언 배추 뿌리라도 뽑아왔다. 아버지(김명)는 옛날이야기만 하면 할머니가 너무 불쌍하다고 울먹이셨다. ‘너희 할아버지는 독립밖에 모르는 분이었다. 조선에는 공이 있지만 가정에는 죄가 많은 분이다.’”(<줄리아의 가족 순례기> 가운데)

김씨는 <줄리아의 가족 순례기> 마지막 대목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의열단’이 필요하다.” 해방 70년, 서울을 찾은 김주영씨는 이런 진단도 덧붙였다. “지금 사람들이 광복을 기뻐하지 않는 것은 광복 전에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는지 모르기 때문이에요.”

해방 70년을 사흘 앞둔 8월12일 저녁 김대지와 구영필, 두 독립운동가의 손녀들은 밤늦도록 무릎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눴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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