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문화류씨 (1@naver.com) (45 남 )
2014/1/17(금) 12:52 (MSIE8.0,WindowsNT5.1,Trident/4.0,EmbeddedWB14.52from:http://www.bsalsa.com/EmbeddedWB14.52,.NETCLR2.0.50727,.NETCLR3.0.4506.2152,.NETCLR3.5.30729) 118.40.28.140 1024x768
"차원부 설원기"에 있는 구예에 대한 기술내용  

 차원부 설원기와 구봉령(1526-1586)의 백담집에 있는 구예에 대한 고찰


1. 능성구씨 족보의 최초의 족보는 구 인, 구사심등이 근 5년동안의 준비기간을 걸쳐 1575년에 완성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1576년 충청도 관찰사였던 구사맹, 구봉령등의 주관하에 청주의 보살사에서 목판으로 간행(능성구씨에는 이를 을해보라고 하고, 이 족보는 지금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현존하고 있다고 한다)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능성구씨 을해보에는 족보 발간에 참여한 내외손의 명단도 들어 있다.


2. 능성구씨 을해보를 보면 구예(具藝)는 증조부는 구존유(능성구씨 시조), 조부는 구민첨, 부는 구연으로 되어 있고 능성구씨 1575년 능성구씨 을해보 발간 전인 1565년 기대승(1527-1572)이 구예의 묘표를 썼는데 그 내용을 보면  “ 그 선대는 고려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증조는 구존유로 검교상장군을 지내고 이후 벽상삼한삼중대광이 되었고, 고조 구민첨은 전주목사록참군겸장서기를 하였고, 조 구연은 안동면도감판관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위 삼세가 과거에 급제하였다고 하고, 구예도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중대광 판전의사가 되었고 면천부원군에 봉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구예는 신씨와 혼인하여 1남 2녀를 낳았고 1남은 구영검(?-1356)이고 장녀는 임급(?-?), 차녀는 최안도(1294-1340)에게 출가했다” 고 기록하고 구예의 묘표임에도 불구하고 주로 구예의 상계와 구예의 후손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구예에 대한 구체적인 기술은 없다.


3. 1565년 기대승이 구예의 묘표를 쓰면서 묘표의 주인공인 구예에 대한 구체적인 기술은 못한 것은 구예(생몰년도미상이나 구예의 아들 구영검, 사위 최안도등의 출생연도등을 고려하면 1270년정도에 출생한 것으로 보이고 1340년에 사망한 구예의 사위 최안도의 묘지명에 보면 최 안도는 구예의 딸과 혼인하였고, 그 장인인 구예에 대하여 고(故) 봉익대부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최안도가 사망하기 전에 구예도 사망한 것으로 보여지고 고려시대 관직제도에 의하면 봉익대부는 종2픔(하)의 품계명으로 1310년 최초로 시행되었다가 1356년 봉익대부가 영록대부로 변경되고 다시 1362년 영록대부가 봉익대부로 변경된 것으로 보아 구예는 1310년에서 1340년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가 1575년 족보를 만들 당시 300여년전 조상으로 너무 세대가 오래되어 가승이나 가첩에도 전하는 바가 없고 또한 고려사, 고려사절요 및 고려 후기 문집등에서도 구예의 행적이 나온 바가 없기 때문에 실제 묘표의 주인공인 구예에 대하여는 짧게 언급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3. 그런데 구봉령(1526-1586)의 문집인 백담집 권9 잡저 묘표에 선조고려평장사부군(구예)묘표가 들어 있고 여기서 (차원부)설원기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차원부 설원기에 들어 있는 능성구씨와 관련된 내용을 취하여 구봉령은 구예의 묘표를 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具氏之先。系出綾城。鼻祖諱存裕。起縣吏登魁科。官至三重大匡,檢校,上將軍。公上將軍之子也。諱民瞻。麗初筮仕。始補全州牧司錄參軍兼掌書記。積秩位同平章事。旣卒。迺卜連珠山。向午之原。窆焉。金鰲層翠。蔚然相對。配夫人卜氏。沔川大家。考允亮。奉正。祖冒龍。曾祖智謙。官終太師。諡武功。與申崇謙,庾黔弼諸公。翼顯廟。開創麗業。宏勳偉績。輝暎簡策。夫人之歿。與公同麓。間四五步上。卽公之墓也。庇兆之木。鬱蔥成林。雖世代綿邈。子姓稀罕。奠薦之禮廢絶。而行路之人。咸指謂政丞墓山者古也。不幸中世。惡少構孼。和順人朴英金淑坤等。敢肆凌侮。汚衊塋域。或葬其曾先。或葬其母。惟意所至。橫逆是加。孱孫之居縣地者。靡不痛切于骨。淚承于睫。蓋有年。嘉靖丁未。宗孫具壽聃天老公獲譴。以亞卿出按是道。於是鄕人備告其由。公卽發憤。召致二人于獄。按治如法。遂以是歲八月日。掘去其塚。增土砌石而新之。又令進士具爾瞻具圖南等。致祭而慰安焉。公生諱珚。決科安東面都監判官。配韓氏。判官生諱藝。擢嵬第。卒官沔城府院君。配申氏。府院君生諱榮儉。沔城君。沔城生四子。諱褘。軍器寺少尹贈門下左政丞。諡文貞。其次曰興,曰僖,曰義。左政丞生四子。諱鴻。左侍中。卽齡之七代祖。次成亮。判安東府使。次成老。西北面都元帥。次成祐判書。次成德。宰臣。無嗣。自此以後。根深藥茂。源遠流長。兩科顯揚者。代不乏人。豈非祖先遺澤。波及後世而然歟。嗚呼。公初自庶僚。竟致公輔。則其間豈無隆功盛烈。彪炳中外。嘉言善行。薰染耳目。而惜其家牒毁缺。

國乘茫昧。竟無傳焉。豈不痛哉。惟現於雪冤記者。謂公謹身下士。不忘其祖之寒賤。亦謂府院君。以王室椒親。位登樞密當忠宣北朝之日。思王所嗜。則對鹽菁而灑涕。念已寒系。則聞螺角而下床。斯二父積德流光。豈無其遐云爾。則是特管中之豹。九苞之一毛耳。於公未足爲增損。而爲子孫者。沐浴餘澤。佩服先訓。思之思之。又重思之。則其於無忝之義。庶或近之矣。鳳齡猥以不肖。竊祿

淸朝。隆慶戊辰。僭承災傷御史之命。行過是縣。適緣使事。未及拜展于墓下。霜露之愴。靡有窮已。復於今年夏。按節南來。爰以八月十六日乙丑。行祗謁之禮。設奠酹之席。悶其堂封蕪沒。階蕝頹圮。遂謀諸鄕人。爲改修之擧。實於十月二十四日壬申始事。越數日而畢其功。因略敍其世系梗槪及修墓節次。購石而刻之。以告子孫於無窮。亦以自飭云。

4. 묘표 내용을 보면 구봉령은 자신의 선조 구예에 대하여 고려사나 각종 문헌에 전하는 바가 별로 없어 무척 애통하였던 것 같다. 구봉령을 포함한 구예의 후손들은 1565년에 기대승에게 부탁하여 최초로 구예의 묘표를 작성할때에 다방면으로 선조인 구예의 행적을 찾으려고 노력했을 것이고 또한 그 이후 1570년부터 능성구씨 내외손들이 근 5년간 준비하여 1575년 능성구씨 을해보를 만드는 과정에서 구예의 행적을 찾을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구예에 대한 문헌적 기록은 고려사,고려사 절요, 고려 후기 및 조선초 문집등에서 그 행적이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이 없어 1565년 기대승이 쓴 묘표 및 1576년 발간된 능성구씨 을해보에서는 구예의 과거급제사실과 관직만 짧만하게 기록만 하고 있었다.


5. 이렇게 1576년 능성구씨 을해보가 발간되고 나서 구봉령이 1586년에 죽기전에 약 10년 사이에 구봉령은 구예의 후손들이 그토록 찾고자 했지만 찾지 못한 구예의 행적을 차원부설원기에서 발견하게 된다. 구봉령이 1576년~1586년 사이에 쓴 구예의 묘표중 “惟現於雪冤記者。謂公謹身下士。不忘其祖之寒賤。亦謂府院君。以王室椒親。位登樞密。當忠宣北朝之日。思王所嗜。則對鹽菁而灑涕。念已寒系。則聞螺角而下床。斯二父積德流光。豈無其遐云爾。則是特管中之豹。九苞之一毛耳。於公未足爲增損。而爲子孫者。沐浴餘澤。佩服先訓。思之思之。又重思之。則其於無忝之義。庶或近之矣。鳳齡猥以不肖。竊祿 ”이 부분이 차원부설원기에 나오는 내용이고 실제 차원부 설원기 기(記)에서 구예와 관련된 내용은 차원부의 상계 차송우를 언급하면서 나오는데 차원부 설원기에서 구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차송우(? - 1268)는 고려 고종조의 훈구(勳舊) 노신이다. 전일에 권신 최충헌 자손 4대가 국권을 계속 잡아 조정의 기강을 어지렵혔는데 역적의 싹이 이미 중국에서 드러났었다. 공이 류경(1211-1289)등 10여 명과 같이 임금을 도와 대계를 결정하여 최의 등 뭇 흉측한 무리들을 제거하고 옛날 정사를 다시 새롭게 함으로써 위사(衛士)의 호칭을 받았다.


차송우(?-1268)는 왕씨의 지친으로 벼슬이 내시윤에 이르렀는데 내시는 내시윤(內侍尹)으로서 1품이나 2품등이 있어 겸직하였다. 궁중의 환관을 거느려 임금의 행동에 따라 지휘를 하는데 매우 가까운 종친이나 외척이 아니면 할 수 없다. 공이 왕씨의 사직을 호위한 훈신(勳臣)으로 원나라 조정에 이름이 드러나 금은제기(金銀祭器)를 하사 받았는데 그의 아내 구씨(능성구씨 구예의 딸)가 꽃(妓女)을 질투하여 깨트리였으므로 물의가 생겨 임금을 움직여 그의 아내 지기(之己)가 영원히 부모의 은혜를 끊고 오로지 여자의 행실에만 고민한다고 벌을 주었다. 공이 또 부끄러워하고 송구(悚懼)하여 10여 년 간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고 질투하는 아내 성질의 어려움을 경계하였다.(공에게 아내 다섯 명이 있었다. 구씨가 아들 넷을 낳았다. 그 뒤에 두 집의 권신 딸에게 장가를 갔는데 끝이 좋지 않아 결국 내서 강윤소에게 참소를 입어 간신 임연에게 해를 입었으니 한스러운 일이다. 혹은 공이 1백7세를 살았다고 하는데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리고 류씨와 차씨의 신라 본계에 있어서는 고려조 서희가 찬집한 찬집여사(撰集餘史)와 정시상의 서경잡지(西京雜記 ) 김방경의 초당일기(草堂日記)에 드러나 있다.

그 뿌리는 세은지관(世恩之觀)에서 태동하였고 신(신발)은 귀봉지계(龜封之階)에다 놓았다. 세은(世恩)이라는 것은 왕씨의 지친으로 대대로 왕씨의 국은을 입었다는 것을 일컫는다. 귀봉이라는 것은 거북이의 문양으로 계단을 꾸미는 것이다. 종족(宗族)이 아니면 할 수 없다.

몸은 비록 귀하지만 귀하게 여기지 않고 사람이 비록 천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궁핍한 외딴 마을에서 평범한 신분일 적의 뜻을 변치 않았다. 위포(韋布한색한 의복)의 뜻을 변치 않는 것은 귀해져도 평범할 때의 뜻을 변치 않고 외딴 마을에서 살 때의 은혜와 친구를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장인 구예(?-?, 아들 구영검 및 사위 최안도등의 생몰년도로 추정해보면 구예는 1270년대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됨)도 벼슬이 1품에 이르렀다. 전에는 공(구예)이 송우(?-1268)의 첩 손서였는데 뒤에는 공(구예)이 도리어 송우(?-1268)의 장인이 되었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비난 하였다. 왕씨의 외척으로 벼슬이 추밀(樞密)에 이르렀으나 임금이 능원(陵園)에다 연회를 하사할 때 몸소 술을 노인에게 먼저 올렸다. 밥상에 무김치를 대하면 북쪽으로 간 임금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고려 충선왕이 북쪽 원나라에 가 입조(入朝)했을 때이다.) 충선왕이 무김치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공이 밥을 먹을 때에 반드시 무김치를 놓았는데 북쪽으로 간 임금을 사모하기 때문이었다.

아문(衙門관청)에 소라 소리가 나면 대뜸 평상(平床)에서 내려가 땅에 엎드리며 가난하게 살던 조상이 고초를 읊었던 생각을 늦추지 않았으니 공(具藝)의 윗대 조상은 능성의 아전이였다.

아문에 소라 소리가 나면 대뜸 평상에서 내려가 땅에 엎드린다는 것은 소라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내려가 땅에 엎드린다는 것이다. 전일에 권신 임연 임유무 부자를 죽였으니 잔당을 섬멸하지 못하여 고려 말에 이르러서는 교만과 사치를 숭상하였다.

그러나 공은 가세가 너무 성대한 것을 경계하여 외람된 생각을 하지 않고 조상이 미천한 사람에게 굽혔던 뜻으로 공손히 기를 낮추어 자신의 귀한 티를 내지 않았는가 하면 그의 사위 송우가 해를 입은 것을 더욱 두려워하여 더더욱 겸손하여 스스로를 낮추었다. 비록 겸손하여 스스로를 낮추는 마음이 있었으나 공의 이름이 큰 문벌에 속해 있으므로 화를 면치 못할까 의심하여 날마다 시종(始終) 경선(慶善)을 유지 하였으면 하는 생각을 하였고 그의 할아버지 민첨도 근신하고 사람에게 허리를 굽혀 미천한 조상을 잊지 않았다. 공이 할아버지를 이어 효도하고 문채를 갖추어 일신을 편안이 보존하였고 남을 이길까? 두려워하는 등 세심히 생각한 것은 신명(神明)스럽고 덕이 있었다.“


6. 실제 차원부 설원기에서 능성구씨 및 구예에 대한 기술은 그렇게 좋지 않게 쓰고 있다. (1) 능성구씨가 아전에서 출발했다고 하고 (2) 구예는 차송우의 첩 손녀와 혼인했다고 하고 (3) 그리고 차송우는 구예의 딸과 혼인했다고 하는 등 비상식적이고 횡설수설(차송우는 1210년대경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고 구예는 1270년대경 출생한 인물이다)하고 있다. 구봉령도 차원부 설원기를 보면서 이와 같은 내용을 보았을 것인데 묘표에는 구예의 사위가 차송우라는 것을 언급도 하지 않고 구예에 대한 기술중 좋은 점(일부 능성구씨가 한미한 가문이었다는 점 포함)을 구예의 묘표에 쓰고 있다.


7. 1565년 구예에 대한 묘표를 기대승에게 부탁하여 쓸 당시에도 그리고 1570년부터 능성구씨 내외손들이 근 5여년간 준비하여 1575년 능성구씨 을해보를 만들때까지 실질적으로 능성구씨 가문을 일으킨 구예를 행적을 찾기 위해 구봉령은 물론 구예의 후손들이 백방으로 뛰었을 텐테 그때는 발견되지 않았던 구예에 대한 행적이 능성구씨 족보가 발간된 후 1576년부터 구봉령이 죽은 1586년 사이에 차원부 설원기에서 구예의 행적을 찾았다는 것이다. 1456년에 만들어졌다는 차원부설원기가 어디에 꼭꼭 숨어있다가 1576년이후에 나타난 것일까? 1576년이면 차천로의 나이가 20세요 1586년이면 30세의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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