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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대종회
2017/7/21(금)
중도를 지킨 철학자 백담(栢潭) 구봉령 ① 중도를 지킨 철학자 백담(栢潭) 구봉령 ① 중도를 지킨 철학자 백담(栢潭) 구봉령 ①  

 

 

중도를 지킨 철학자 백담(栢潭) 구봉령 ①

“당인(黨人)들아 촉(蜀) 땅의 개를 돌아보라” 

동서 당쟁에 초연하면서도 사헌부 시절 목숨 건 상소문 올려...

관직 많아 위패 글씨만 98자에 달하지만 집 한 칸 없이 마감한 청빈한 삶

 

문재인 대통령의 집권으로 9년 만에 다시 여야가 바뀌었다. 정치의 격변기다. 6월 10일로 출범 한 달을 맞은 문재인 정부는 국무총리·장관 등 여전히 내각을 짜는 중이다.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많은 후보자가 위장전입 등 문 대통령의 공직 배제 5원칙에 걸려 곤욕을 치렀다. 야당은 청문회에서 후보자의 부도덕함을 질타했다. 특정인을 낙마시킬 기세로 극단의 주장도 쏟아냈다. 또 여당 지지자들은 그런 야당 의원을 무력화하기 위해 인신을 공격하는 ‘문자 폭탄’을 날렸다. 조선시대에는 정치의 격변으로 선비들이 수난을 당했다. 이른바 사화(士禍)이다. 네 차례 사화로 세조를 도운 훈구 세력은 몰락하고 사림파가 지배세력으로 등장한다. 사림은 선조 시기 다시 동서(東西)로 분당(分黨)된다. 동인·서인의 당쟁이다. 이런 당쟁 속에서 벼슬에 있으면서도 사림의 도(道)를 구현하려는 집단이 있었다. 퇴계 이황의 제자들이다. 이들 중 요직을 거치면서도 중도(中道)를 지킨 이가 있었다. 동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것이다.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1526∼86) 선생이다. 그는 극단의 주장이 고개를 들던 시대에 어떻게 중도에 설 수 있었을까. 어느 쪽으로도 휩쓸리지 않을 만큼 내공이 깊었던 것일까.  5월 31일 경북 안동시 와룡면 가구2리를 찾아갔다. 안동시내에서 북쪽으로 도산서원을 향해 가다 와룡면사무소 앞에서 동쪽으로 난 길이다. 2㎞쯤을 올라가자 도로 옆 산기슭에 솟을대문 한옥 한 채가 보였다. 자동차 소리를 듣고 어르신이 나왔다. 백담의 13대 후손으로 고향을 지키는 구운회(77) 씨였다. 그가 문을 열자 한옥 한가운데 처마에 ‘東岡書堂(동강서당)’이라는 편액이 보였다. 1546년 21세 구봉령이 직접 지은 서당이다. 건물 한 채지만 선생의 정신을 이해하는 핵심 유적이다.

 

부모 묘소 아래 서당을 지은 뜻

서당을 건립한 동기가 예사롭지 않다. “백담 선조께서 사마시에 합격한 뒤 어린 시절 여읜 부모님을 추모하고 글을 읽기 위해 지었답니다.” 구봉령이 성균관에 입학하는 사마시에 합격한 건 그해 9월. 시험을 감독한 시관(試官)은 답안지를 보고 “훗날 문장을 주장할 이는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그는 작은 성취에 안주하지 않고 서당을 지었다. 그것도 아버지의 묘소 바로 아래였다. 그리고는 ‘동강’이라 이름 붙이고 좌우에 책을 쌓은 뒤 옷깃을 여민 채 단정히 앉아 종일 책을 읽었다.↑구봉령이 21세에 와룡산 아버지 묘소 아래에 지은 동강서당. 13대손 구운회 씨가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동강서당은 본래 1㎞쯤 떨어진 부모 묘소가 있는 주계리 와룡산 아래에 있었다. 구봉령의 어머니 권씨는 선생이 7세 때 돌아가셨다. 이어 5년 뒤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난다. 그때부터 할머니 아래서 자라며 외종조부인 권팽로의 가르침을 받았다. 구봉령은 16세에 <논어>를 읽다가 크게 깨닫는다. “먹음에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거처에 편안함을 구하지 않는다(食無求飽居無求安)”는 구절이다. 관직보다는 성경(誠敬)과 의리를 실천하는 성현의 길을 따르기로 뜻을 세운 것이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느라 시묘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제삿날이 되면 초상을 당한 것처럼 애통해 하고 소식(小食)하며 베옷을 입고 그 달을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뒤늦게나마 시묘의 심정으로 묘소 아래에 서당을 지은 것이다. 효심(孝心)의 발로다.  서당 이름 ‘동강(東岡)’에도 뜻이 있다. 동강은 동쪽 산비탈을 가리킨다. 여기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물러나 자연을 즐기며 지내겠다는 깊은 뜻이 숨어 있다. 후한(後漢)의 주섭(周燮)이 벼슬에 나아가지 않자 친지들이 “그대만 어찌 유독 동쪽 산비탈을 지키는가”라고 물은 데서 유래한다. 구봉령은 서당에서 책을 읽고 시를 읊으며 지칠 줄을 몰랐다. 이를 본 사람들이 자제들을 맡겼다. 서당 안으로 들어섰다. 양쪽에 방이 하나씩이고 가운데는 마루인 구조다. 오른쪽 방은 잠겨 있었다. 문단공(文端公)이란 시호가 내려져 불천위(不遷位)가 된 백담의 위패가 모셔진 곳이다. 구운회 후손은 “서당을 중창한 뒤 여기서 불천위 제사를 모신다”며 “그때부터 지내리 사당의 위패를 옮겨왔다”고 설명했다.

 

동강서당은 1612년(광해군4) 용산서원(龍山書院)이 되고 1633년(인조11)에는 사액서원인 주계서원(周溪書院)으로 승격한다. 하지만 주계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됐다. 그러면서 서원은 허물어지고 축대와 주춧돌은 수십 년 전까지 뒹굴다가 농토가 되면서 흔적마저 사라졌다.  후손 모임인 송백회(松栢會)는 2009년 십시일반 정성을 모아 안동 입향조인 백담의 고조(구익명) 묘소에 딸린 땅에 동강서당을 중창한 것이다.  구봉령은 일찍이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열다섯 살이 넘으면서 이미 문장을 잘한다는 말을 들었다. 20세에는 책 상자를 짊어지고 청량산으로 들어가 학문에 몰두했다. 밤낮으로 의대(衣帶)를 벗지 않고 말 위에서도 경전 암송을 그치지 않았다.  당시 퇴계 선생이 가까운 계상(溪上)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구봉령은 제자의 예로 정중하게 배움을 청했다. 퇴계의 첫 반응은 뜻밖이다. ‘백담연보’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퇴계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공의 박학함을 들은 지 오래되었는데 내 어찌 감히 가르치겠는가’라며 사양했다.” 더 가르칠 게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제자가 된 뒤 핵심을 터득한다.  구봉령의 할머니는 현실론자였다. 손자에게 입신양명(立身揚名)만이 박복한 집안을 일으키는 길임을 강조했다. 그 바람을 외면할 수 없어 백담은 1560년(명종15) 35세 되던 해 가을 별시에 나가 전시(殿試, 임금 앞에서 보는 과거) 2등으로 급제한다. 당시 출제된 문제는 ‘군자를 나오게 하고 소인을 물리치다(進君子退小人)’라는 것. 그는 사악함과 바름을 철저히 구분하는 논지를 펼쳤다. 채점관이 무릎을 칠 정도로 답안은 출중했다. 그러나 결과는 2등이었다. 구봉령이 일찍이 경대부 집을 찾아간 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이튿날 사람들은 관례에 따라 장원급제한 민덕봉 앞으로 몰려갔다. 그러자 민덕봉은 “저 사람이 장원이 돼야 하는데 지금 내가 그릇되게 인사를 받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은가” 하고 말했다. 그때부터 구봉령의 명성이 자자해졌다.

 

홍문관에서 적폐 청산을 진언

백담은 그해 12월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승문원의 권지부정자로 첫 보직을 받는다. 엘리트 코스로 들어선 것이다. 이듬해 6월에는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에, 1562년에는 홍문관 정자 겸 경연전경에 임명된다. 바른 말을 하는 언관(言官)의 자리다. 그해 11월 구봉령은 쌓인 폐단을 듣고 개선책을 제시하는 장문의 상소문을 쓴다. ‘홍문관에서 폐단을 진술한 의소’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강조한 ‘적폐 청산’과 같은 맥락이다. 당시 윤원형(문정왕후의 동생)이 왕대비를 등에 업고 국정을 농단했지만 누구도 감히 직언하지 않았다. 상소의 골자는 이렇다.

 

기강을 세워 명령을 행할 것. 염치를 권장하여 뇌물을 막을 것. 착취를 물리쳐 약탈을 금지할 것. 사치를 억제하여 화려한 집을 헐 것. 관작을 중히 여겨 인재의 등용과 버림을 살필 것. 안팎을 엄하게 할 것. 사기(士氣)를 배양할 것. 군정(軍政)을 정비할 것. 형벌 남용을 막을 것. 학교를 부흥시킬 것. 나라의 근본을 탄탄하게 할 것 등이었다.

 

동료들은 공감하면서도 서로를 돌아보며 난감해 했다. 윤원형은 그냥 있지 않았다. 사간원 관원을 사주해 백담의 탄핵을 추진한다. 그러나 명종 임금은 구봉령의 강직함을 알고 있었다. 2년 뒤 문정왕후가 죽자 윤원형이 도리어 탄핵을 받고 관작을 삭탈당한다. 사필귀정이었다.(다음 호에 계속)

 

 

편집자 주 : 상기 기사는 2017년도 월간중앙 7월호에 게재된 기사로 글을 쓴 송의호 기자로부터 종보 게재 허락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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